춤추는 거울

“미르카, 나 먼저 갈게. 오늘은 좀 피곤해서... 너 도서관 가고 싶다고 했지?” 연습이 끝난 뒤, 교정 한가운데 서 있던 미리나가 말했다. 그녀의 뺨엔 땀방울이 엷게 남아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응. 나 그냥 좀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 책 같은 거.” “그럼 아르카노미콘으로 가봐. 중앙 거울탑 근처에 유리문 하나 있어. 못 들어가는 줄 아는 애들도 있는데, 그냥 열면 돼. 근데... 너무 늦지 않게 와. 집 오는 길 알지?” 미르카는 고개를 끄덕였고, 미리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강아지풀처럼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 도서관 입구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중앙탑 옆, 나무 벽 사이에 끼인 듯한 유리문 하나. 안쪽은 안개 낀 듯 흐릿해,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미르카가..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24. 17:49

연습홀은 오후 햇살에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 미르카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침 수업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어딘가 더 감각적이고, 말수가 줄어드는 공간. 그녀는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지 않았고, 모두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홀 가장 앞에서는 이미 한 소녀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색 레오타드, 맨다리에 맨발. 짙은 갈색 머리를 묶은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엔 감정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손끝이 떠날 때마다 무언가 흐르고,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소리 없이 감정이 흘렀다. 미르카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세렌이야,” 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미르카는 고개만 끄덕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정통 발..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24. 17:43

창문 너머로 새어든 희끄무레한 빛이 방 안을 어렴풋이 채우고 있었다. 아직 잠이 다 깨지는 않았지만, 푹신한 이불과 하늘빛 침대 커버의 감촉이 어제 밤의 모든 일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미르카!” 활기차고 상냥한 목소리. 누군가 이불을 살짝 들쳤다. 미리나였다. 이미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단정히 정리된 파란색 단발머리에 예쁜 하늘색 리본까지 달려 있었다. “이제 레슨 가야지. 일어나!” 미르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시야...?” “8시 반. 원래는 6시 반부터 스트레칭하고 준비해야하는데, 너 너무 피곤해 보여서 그냥 9시 수업 시간에 맞춰 가기로 했어. 지금 10분 안에 준비 안 하면... 문 사라진다?” “문이... 사라진다고?” “나가면서 설명해줄게!” ***..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17. 09:26

그들은 마법학교를 나와 작은 숲길을 따라 걸었다. 자주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미리나는 그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질렀지만, 미르카는 마음 어딘가가 조금씩 웅크려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미리나가 말했다. 그리고 곧, 미르카는 믿기 힘든 광경과 마주했다.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낸 곳은, ‘집’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비현실적인 장소였다. 철제 문 너머로 펼쳐진 광대한 정원에는 다듬어진 나무들과 가지런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정중앙에는 물줄기를 높이 뿜는 대리석 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 너머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하얀 외관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웅장한 건축물. 미르카는 그 건물의 외벽을 보며 유럽 여행 책자에서 본 고성(古城)을 떠올렸다. “진짜... 여기에 사람이 살..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17. 09:16

오늘 토베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처음부터 자세가 곧고, 순서를 틀리는 일도 없었다. 평소라면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리거나 남들보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곤 했는데, 오늘은 모든 게 정확했다. 심지어 발끝까지도 뾰족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르카는 옆에서 토베의 동작을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웬일이지?’ 노아도 그걸 느낀 듯했다. 보통은 눈빛만 흘기고 지나가던 그가, 오늘은 분명히 말했다. “토베, 오늘 잘했어. 이제 보충수업은 안 해도 되겠네.” 순간,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미르카는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훑었다. 모두들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놀람, 의아함, 그리고 어딘가 모를 불편함. 보충수업 시간, 토베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르카는 미리나, 아엘, 그리고 몇몇 아이들과..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9. 13:45

기본 클래스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수현은 새로운 클래스를 신청했다. 지민 선생님이 주 1회, 한 달간 진행하는 ‘작은 작품반’이었다. 작품명은 ‘눈송이 왈츠’. 「호두까기 인형」 속, 하얀 무대 위의 눈송이들을 표현한 군무 장면이라고 했다. 클래스 설명에는 "취미생을 위해 쉽게 변형된 안무"라고 적혀 있었다. 수현은 별 생각 없이 신청했다. 춤이란 건, 함께 맞춰서 추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조금. 아주 작은 호기심. 그뿐이었다. 별로 큰 기대도 없었고, 자신이 무대에 서게 될 거라든가, 감동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든가―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냥, 경험해보는 것. 가볍게. 첫 수업에서 배운 건 다리 위치나 손끝보다 ‘어디를 보고,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였다. 음악이 시작되면 8카운트 안에..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9. 13:34

발레수업은 늘 그랬듯 조용히 시작됐다. 조용하다는 건, 대화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류가 있었다. 팽팽하고 날선, 동시에 어딘가 절박한 공기.모두가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수현은 바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바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기울여 스트레칭을 할 때, 미리나가 달아준 얇은 목걸이줄에 매달린 펜던트가 가슴뼈에 살짝 닿았다.레오타드 안에 숨겨져 있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그녀는 스스로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꼈다.​지난번, 아르카디움에서 날아다니는 리본―리브리엘―들이 그녀의 자세를 고쳐줬던 순간이 떠올랐다.팔을 뻗을 때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고, 척추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안정감이 있었다.오늘 그녀는 애티튜드 발란스 자세에서 확실히 뭔가 잡힌 감각이 있었다.​“나쁘지 않네...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7. 16:29

회의실 형광등이 깜빡이며, 낮은 진동처럼 소리를 냈다.수현은 회의 테이블 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앞에 놓인 메모장 위에는 ‘Pre Production 샘플 바이어 컨펌 시기 조율’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엔 무의식 중에 적은 단어 하나가 선명했다.‘리브리엘.’​그녀는 펜을 내려두고 손으로 글씨를 문질렀다. 잉크가 번져 마치 춤추듯이 퍼졌다.​​“정수현 씨?”박과장이 신경질적으로 수현의 이름을 불렀다.회의실 안의 모두가 수현을 쳐다봤다.​“다음 주 들어가는 새로운 브랜드 샘플 진행 건, 확인하셨죠?”​“아... 네. 확인했습니다.”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창밖은 비가 올 듯 흐렸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향해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그 속에서, 그녀만 멈춰 있는 것 ..

회차보기/[장편소설] 춤추는 거울 2권 part1 2025. 7. 7. 1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