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마법학교를 나와 작은 숲길을 따라 걸었다. 자주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미리나는 그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질렀지만, 미르카는 마음 어딘가가 조금씩 웅크려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미리나가 말했다.
그리고 곧, 미르카는 믿기 힘든 광경과 마주했다.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낸 곳은, ‘집’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비현실적인 장소였다. 철제 문 너머로 펼쳐진 광대한 정원에는 다듬어진 나무들과 가지런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정중앙에는 물줄기를 높이 뿜는 대리석 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 너머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하얀 외관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웅장한 건축물. 미르카는 그 건물의 외벽을 보며 유럽 여행 책자에서 본 고성(古城)을 떠올렸다.
“진짜... 여기에 사람이 살아...?”
미르카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미리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집이 좀 넓긴 하지.”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돌로 포장된 긴 진입로를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본관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고풍스러운 목재문이 열렸고, 그 안에는 정식 메이드 복을 입은 하녀들이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미리나는 돌아보며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이분들한테 말하면 돼.”
미르카는 말을 잃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색 대리석 바닥은 발소리를 경쾌하게 반사했고, 천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으며, 벽에는 초상화와 은색 촛대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더 믿기 힘든 세계였다.
미리나의 방에 도착했을 때, 미르카는 다시 한 번 숨을 삼켰다.
커다란 커튼이 드리워진 캐노피 침대, 금빛 프레임의 화장대, 잔잔한 빛을 뿜는 샹들리에, 그리고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명백히 고급스러운 소품들.
모든 것이 동화 속 ‘공주의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와... 진짜... 방도 너무 예쁘다.”
미르카가 감탄하자, 미리나는 말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어딘가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곱게 묶은 요크셔 테리어 한 마리가 공주 옷을 입은 채 달려와, 시끄럽게 짖었다.
“얘는 루비야. 루비, 손님이야. 짖지 마.”
말이 끝나자마자 강아지는 얌전히 미리나 쪽으로 다가왔다. 미리나는 강아지를 안아들며 물었다.
“음료수 마실래? 레모네이드 좋아해?”
“그러면... 고맙지.”
그러자 미리나는 익숙한 듯 종을 흔들었고, 잠시 후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레모네이드 두 잔 부탁해요.”
“네, 아가씨.”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다는 듯, 미리나는 천연덕스러웠다.
소파에 마주 앉은 뒤,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너, 혹시 여기 사람이 아니야?”
미르카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어떻게 알았어...?”
“느낌이 좀 있었어. 예전에 너 같은 분위기의 사람이 있었다고... 선배들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
그 말과 함께 미리나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미르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 그곳에서 취미로 발레를 하고, 회사를 다니며, 30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곳에서는 몸이 무겁고 늙어가지만, 이 세계에서는 어딘가 가벼워지고 젊어졌다는 것.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발레는 잘하지 못했지만, 그냥 너무 좋아서 계속 하고 있었던 이야기까지.
미리나는 진지하게, 때때로 웃으며, 다정한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 표정에는 놀라움보다는 따뜻한 이해가 더 많았다.
“너 참 재밌는 애다!”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혹시... 갈 곳 없으면, 우리 집에서 지내도 돼!”
미르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래도 돼?”
“물론이지. 넌 내 친구니까.”
그 말이 너무 따뜻해서, 미르카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이 마법 같은 세계에서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
잠시 후, 미리나가 메이드를 불러 무언가를 부탁한 뒤,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했을 거야. 씻고 이분이 안내해주시는 방에서 푹 쉬어.”
미르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드를 따라 어떤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고요하고 단정한 공간이었다.
희고 담담한 벽지, 하늘빛이 감도는 침구, 조각처럼 정제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미리나방에서 느꼈던 화려함과는 달리, 여긴 왠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스르륵 들어왔다.
멀리 정원의 분수가 아직도 물소리를 내고 있었고, 하늘 위엔 달과 별이 느릿하게 떠 있었다. 그 모습은 현실의 원룸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그 방―
창밖은 바로 옆 건물의 회색 벽.
에어컨 실외기 소리와 택시 브레이크음이 밤을 채우던 그 방이 문득 떠올랐다.
그 방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둥글게 몸을 말고 자다가, 때때로 자신의 발을 핥던 고양이, 무겁고도 사랑스러운 고양이. 그 고양이의 이름은 그냥 ‘고양이’였다. 그것은 정수현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헤어질것이 두려워 지은 이름같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책상 위,
해바라기 화분 인형, 지노.
말 걸면 대답하던 그 말투도, 그 목소리도 그리웠다.
문득, 한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지금 거긴, 시간이 흐를까...?
아직도 내가 나가기 전 그대로일까?.
이상했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고양이도 잘 자고 있고, 지노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느껴졌다.
미르카는 창가에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폭신한 이불을 살짝 들추고 몸을 누였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나, 돌아가고 싶지 않아. 조금 더... 여기 있고 싶어.’
외로움 같은 건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지금 여기가, 나를 기다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감자,
창밖에서 들어온 달빛이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지만,
그 밤은 왠지 따뜻하게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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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장편소설 《춤추는 거울》의 세계관에서 파생된 단편 영상 프로젝트입니다.
현실과 감정, 그리고 마법의 경계선 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
짧지만, 당신의 마음 어디쯤에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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