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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춤추는거울》 제 16화 작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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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클래스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수현은 새로운 클래스를 신청했다.
 
지민 선생님이 주 1회, 한 달간 진행하는 ‘작은 작품반’이었다.
작품명은 ‘눈송이 왈츠’.
「호두까기 인형」 속, 하얀 무대 위의 눈송이들을 표현한 군무 장면이라고 했다.
클래스 설명에는 "취미생을 위해 쉽게 변형된 안무"라고 적혀 있었다.

수현은 별 생각 없이 신청했다.
춤이란 건, 함께 맞춰서 추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조금. 아주 작은 호기심. 그뿐이었다.
별로 큰 기대도 없었고,
자신이 무대에 서게 될 거라든가, 감동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든가―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냥, 경험해보는 것.
가볍게.
 
첫 수업에서 배운 건 다리 위치나 손끝보다 ‘어디를 보고,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였다.
음악이 시작되면 8카운트 안에 대형을 맞추고, 회전하는 위치가 엇갈리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조금 복잡했지만, 어렵진 않았다.
수현은 처음으로 공간이라는 걸 인식했다.
누군가의 옆에 있다는 것,
누군가보다 반 발짝 앞에 나가야 한다는 것.
음악이 흐르고, 발이 움직이고, 팔이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공간은 달라졌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웃거나, 감탄하거나,
기억에 남을 감정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저 괜찮았다.
음악과 함께 걷고, 사람들과 나란히 돌아서고, 손끝이 바람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게, 이상하게 좋았다.
 
수현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자기 몸이 살짝 가벼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도였지만 자기만은 알 수 있는 어떤 미세한 변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현은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대답을 찾지는 않았다.
그냥, 다음 수업도 가고 싶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눈송이 왈츠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처럼 흩어지고, 모이고, 내려앉고, 또 떠올랐다.
 
정해진 음악 속에서, 사람들은 팔과 다리를 맞춰 걷고 뛰며 작은 동심원을 돌았다.
천천히, 조용히, 부서지듯 움직이는 사람들.
수현은 그 안에서 자신이 어디쯤에 있었는지도 가끔 잊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팔이 반 박자 빠르게 지나가고, 그 팔 위에 붙은 은색 반짝이들이 조명 아래에서 깜빡거렸다.
 
눈송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와 닿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스며들 듯, 사라지는 것.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들은 건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지민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의자에 앉은 채로 말했다.
 
“작은 공연이에요. 학원생 발표회 같은 거죠. 하고 싶은 분, 신청서 주세요.”
 그는 감정 없는 말투로 말했다. 마치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수현은 신청하지 않았다.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냥, 그건... 다른 사람들 몫 같았다.
몸의 선이 완성되고, 팔을 부드럽게 뻗을 줄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축제.
 
 
***
 
 
공연 날, 수현은 조금 일찍 도착했다.
3시 15분.
공연은 3시 30분.
리허설로 무르익은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는지 홀안의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백스테이지를 구경하고 싶어졌다. 작은 홀에 준비 된 임시 분장실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간이 화장대가 설치된 분장실 안에는,
화장품 냄새와 헤어스프레이 냄새, 그리고 약간의 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눈 위에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을 올리는 손,
반짝이 스프레이를 흔드는 손,
머리장식을 손보고 있는 손.
 
수현은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오늘 할 공연의 음악이 들렸고, 누군가는 초코바를 먹고 있었다.
 
그냥 그런 것들이 좋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공기,
무언가가 곧 시작될 것 같은, 설렘과 긴장의 시간.
 
“다쳤어요!”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소리는 분장실을 한 바퀴 빠르게 돌았다.
리허설은 중단되었다.
 
지민이 무대로 다가왔고,
발목을 붙잡고 주저앉아있는 어떤사람을 보는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거 안 되는데... 대형이 깨지면 공연이 안 돼요... 이를 어쩐다...”
그는 머리를 세게 긁으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홀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수현을 보았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에 시간이 멈춘듯이 느껴졌다.
그의 눈은 흔들렸고, 하지만 곧, 그 흔들림은 멈췄다.
 
“수현 씨. 같이 배웠잖아요. 클래스 다 나왔고, 자리도... 기억하죠? 지금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수현은 대답하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눈송이들과 지민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수현은, 그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용기인지 몰랐지만.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얼른 분장실로 뛰어가 화장대에 앞에 앉아서 머리를 묶었다.
화장대 앞, 분장을 받는 동안 수현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누군가가 자신의 눈 밑에 펄을 얹는 걸 느꼈고, 다른 누군가가 속눈썹을 붙이고 있었다.
 


다친 사람이 벗어준 의상의 하얀 레이스가 팔에 닿았다.
조금 차가웠고, 조금 부드러웠다.
다행히 의상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잘 맞았다.
 
홀로 돌아가보니 설치된 조명에 무대는 빛나고 있었다.
 
조명이 무언가를 비추고 있을 때, 세상은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바람에 눈송이가 휘날리듯, 수현은 그냥 앞사람을 따라갔다.
 
팔을 올리고, 다리를 뻗고, 돌아섰다.
몸은 동작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냥 음악에 맞춰 그대로 몸을 흘러가게 놔뒀다.
 
어느새 조명이 꺼지고, 박수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웃었고,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다.
 
수현은 다시, 조용한 분장실로 돌아왔다.
거울 앞.
얼굴에 묻은 펄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손등을 닦으려다, 잠깐 멈췄다.
조금 남은 반짝이가 화장대의 조명에 반사되어 작은 별처럼 보였다.
 
빛은 크지 않았다.
누구도 그걸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현은 느꼈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자기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지만, 조용히 마음을 스쳐간 감정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 정식 소설은 네이버 웹소설에서 연재 중입니다:
http://novel.naver.com/best/list?novelId=1187690

 

📍Instagram 감성 버전도 함께 보실 수 있어요
@dancing__mirror

장편소설《춤추는거울》 세계관 컨셉아트 인스타를 개설하였습니다.

감각적인 그림과 함께 소설의 글귀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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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장편소설 《춤추는 거울》의 세계관에서 파생된 단편 영상 프로젝트입니다.
현실과 감정, 그리고 마법의 경계선 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
짧지만, 당신의 마음 어디쯤에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제 16화 작은 공연> 바로보기

https://youtu.be/K9m1VXZeO8g?si=CWbeJXaIjCnK30Z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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